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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영피트
2019.12.13
희영피트 2019.12.13

안녕하세요, 희영-피트입니당.

 

와아, 하자가 스무살이 되었군요.

제가 처음 하자에 발을 디딘게 2000년 11월, 하자의 첫번째 생일잔치 준비에 한창일 무렵이었어요.

그때 참 추웠는데.

당시 저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이미 1년 넘게 유보해오고 있던 자퇴결정을 앞두고 있었고,

뭐랄까, 믿을 구석이 필요했었어요. 내 결정이 틀린게 아니다, 이런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하자에 오게되었죠. 여기라면 나같은 애들이 수두룩 빽빽할 테니까. ㅎㅎ

 

그때 만났던 친구들,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제 곁에 있네요.

하루가 멀다하고 톡을 주고받는 친구부터 일년에 한두번 안부인사 하는 친구까지

그 거리와 온도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제가 '친구'라고 부르는 존재들은 죄다 하자에서 시작된 인연들이예요.

알고보면 성격 좀 이상하고 은근 사회성 떨어지는 저에게 따뜻하고 한결같은 친구들을 만들어준 하자, 감사합니다.

무척 외로울뻔한 인생, 덕분에 크게 외롭지 않게 살고 있어요.

 

사랑받았던 기억이 많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뱉고 싶은 질문, 언제나 할 수 있는 어른들, 비판없이 들어주는 어른들이 공기처럼 존재했었어요.

제 자신이 작게 느껴지는 날이면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주던.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그들도 사실 나이로만 따지면 뭐 그닥 주름 지긋한 어른들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어른노릇하느라 판돌들도 참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ㅎㅎ

누군가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관계에서 오는 힘을 알게 해준 하자, 감사합니다.

나를 위해 써주었던 그 무수한 수고와 시간들을 그분들에게 고스란히 되갚진 못할 거예요 아마.

하지만 저도 다음세대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이는 사람으로 존재할게요. 다른 누군가에게 밥도 술도 많이 사고요.  

 

제가 지금까지 굶어죽지 않고 근근히라도 사람구실 하면서 삼십대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하자덕분이예요.

스무살이 될 무렵 하자의 판돌 죽돌들과 '노리단'을 창단하고 2018년 퇴사하기까지,

8명으로 시작한 작은 공연단체를 14년간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으로 키워갔던 그 시간들은 정말이지 

억만금을 줘도 갖지 못할, 귀중하고 값진 기억으로 제 몸 속 깊숙히 박혀있습니다.

공연예술 행위자로 - 기획자로 - 교육자로 사회 곳곳 오만군데를 쑤시고 다녔던, 오만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던 그 시간들은

저를 육체노동+정신노동+정서노동 모두가 가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어요.

한때 잠만 자는 아이로 유명했던 나른하고 게으른 나를 이만큼 변태시켜준 하자, 감사합니다.

덕분에 어디가서든 적어도 욕은 안먹고 잘 살고 있어요.

 

어느날 문득 돌아보니, 그렇게 십오년 훌쩍 넘게 하자동네 주변에서 십대와 이십대를 다 보내버렸더군요.

약간 무서웠어요. 나이 삼십에 이렇게 익숙함에 젖어도 되나 싶고.

그렇게 다 툭툭 접고 훌훌 털어버리고 태평양 건너 남반구에서, 생판 다른 직업인 셰프로 일년 넘게 살고 있네요.

 

특별하고 잘난 존재이고 싶다는 욕망,

내 인생은 무언가 남들과는 다를거라는 기대,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는 선택은 다 옳음에 가깝다는 자신감,

하자에서 키워갔었어요. 이거 떨쳐내는데 정말 오래걸리더군요.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관심,

늘 주변을 관찰하고 질문거리를 만들어가는 습관,

문화와 예술을 아끼고 그 힘을 사랑하는 마음,

흥미를 실천으로 발전시킬 줄 아는 가벼운 몸,

이것도 모두 하자가 키워준거예요. 덕분에 인생이 지루하지 않았어요.

 

저는 오늘도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주방에서 한국과 영어로 번갈아 욕을 듣고 내뱉으며

동서를 막론한 섹시즘 넘쳐나는 조직문화의 일원으로, 타국의 외노자로 내 한몸 바쳐 하루를 살지만

나는 어딜가던 나인채로, 늘 그래왔듯 주변을 돌아보고 나를 돌아보며 재밌게 살고 있어요. 

하자동네에서 자라며 터득한 내공으로 저는 이곳에서 몸도 마음도 비교적 건강합니다.

(아 몸은...솔직히 좀 피곤하긴 한데...암튼간에 ㅎ)

 

내 인생에 오랫동안 함께해준 하자, 고마워요. 

20주년 생일을 너무나도 축하합니다.

 

 

Ps. 시드니에 오게 되면 연락주세요.

밥과 술은....일단 더치페이로....여기 물가가...일단 와보시면 알아요...;;;